서론
인간의 언어활동은 개념의 이해에서 출발한다. 개념이란 사회적으로 의미를 소통하는 낱말의 값을 말한다. 예를 들어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다.’라는 문장에서 ‘수도’라는 명사는 한 나라의 행정 기관이 있는 도시라는 의미를 알아야 쓸 수 있다. 즉 수도의 개념이 있어야 다른 나라 사람을 만났을 때 그 나라의 수도를 물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어떤 단어의 개념은 때로 본래의 뜻을 벗어나 사용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체육’이다. 예를 들어 ‘대한체육회’라는 공식 단체의 명칭에서 ‘체육’이라는 단어는 원래의 개념인 ‘신체 교육’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포츠에 더 가깝게 쓰인다. 실제로 대한체육회의 영어 표기는 ‘Korean Sport & Olympic Committee’로 되어 있다. 만일 이 표기가 옳다면 체육과 스포츠는 같은 지시 대상의 다른 이름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체육과 스포츠는 같은 대상을 지시하지 않는다. 만일 체육과 스포츠가 ‘soccer’와 ‘football’의 관계처럼 동일한 개념과 지시 대상을 갖는다면, 체육을 스포츠로 호명하고 스포츠를 체육으로 호환하여 지칭해도 동일한 개념으로 인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장 잘 알려진 개념인 ‘e스포츠’를 ‘e체육’이라고 부르면 어색하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지시하는 대상 자체가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체육 시험 문항’을 ‘스포츠 시험 문항’이라고 부르면 시험 문항의 구체적인 내용이 달라지게 되어 버린다.
이렇게 스포츠와 체육이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어 사용 화자의 보편적인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육학이라는 학문 영역에서 스포츠와 체육이라는 어휘는 양자 모두 인간의 신체활동을 지시하는 어휘로서 그 개념의 명확한 구분 없이 뒤섞여 사용되고 있다. 체육학계 내부에서도 자기 학문의 개념을 지칭하는 학적 용어의 관성적 사용 문제에 관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비판적인 지적과 개선을 도모하기 위한 노력이 시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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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러나 체육과 스포츠는 여전히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지금 체육학을 전공하는가, 아니면 스포츠학을 전공하는가? 우리의 정체성은 체육인가, 스포츠인가?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학문이 다른 학문과 구별되는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명칭과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서 본 논문은 체육과 스포츠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명료하게 논의하려고 한다. 이는 전통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체육학의 주요 개념어로 호명되었던 체육과, 체육에 비해 등장이 늦었으나 체육이 기존에 함의해온 범주를 넘어 새로운 영역을 포괄하여 지시되는 스포츠의 개념을 비교하여, 새로 등장한 스포츠라는 어휘가 체육의 대체 개념이 될 수 있을지를 고찰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본 논문에서는 우선 체육의 개념적 정의를 확인하고, 체육이 아닌 스포츠라는 명칭이 체육의 일부 영역을 지칭하거나 혹은 개발 및 확장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육을 대체하는 어휘로 완전히 대체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 분석한다. 본 논문의 일차 목적은 체육과 스포츠가 현재의 체육학의 정체성과 전문성을 드러내는 어휘가 될 수 없다고 막연하게 감각해왔던 보편 인지를 철학적으로 논증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 논증을 기반으로 본 논문에서는 체육학이라는 학문의 정체성과 전문성을 보다 잘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대체 개념으로서 ‘운동학(kinesiology)’이라는 개념어의 대체 가능성을 제안하였다.
체육의 개념적 정의와 외연의 한계: 현실과 명칭의 불일치
먼저 체육의 개념부터 살펴보자.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권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체육이라는 어휘를 자주 사용한다. 체육대회, 체육인, 체육수업, 체육 지도자 등등 체육이 가리키는 대상은 무수히 많다. 그런데 이런 용어 중에는 체육의 본래 의미에서 벗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육이라고 호명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체육대회는 스포츠 이벤트(sport event) 혹은 스포츠 페스티벌(sport festival)의 잘못된 표기이며, 체육인은 애슬리트(athlete) 혹은 스포츠인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체육이란 교육을 뜻하는 어휘이기 때문이다. 스포츠 이벤트는 교육 경연대회가 아니며, 전문 운동 선수는 체육 교육자가 아님에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스포츠 이벤트를 체육대회라고 부르고, 전문 운동선수는 체육인이라고 부른다.
체육은 한자로 ‘몸 체(體)’와 ‘기를 육(育)’으로 되어 있다. 개별 어휘의 뜻에 따라 해석하면 체육이란 몸을 기른다는 뜻으로, 몸에 어떤 작용을 가해 이전과 다른 상태나 성질을 갖게 만드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Sato, 2005). 여기서 이 때의 “어떤 작용”이 바로 교육이다. 즉, 다른 말로 체육은 몸에 대한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체육의 영문 표현인 ‘Physical Education’과 정확히 일치한다. 체육이라는 말 자체가 ‘Physical Education’의 번역어이기도 하다.
‘Physical Education’, 즉 체육은 근대라는 시공간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근대 이전 인간의 신체는 교육의 본격적인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근대에 접어들면서, 정확히 말하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생산에 적합한 근대적 몸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학교라는 공교육 제도가 떠맡으면서 체육이 시작되었다. 삼육(三育), 즉 지육, 덕육, 체육은 근대 공교육의 주요 근간을 가장 잘 드러내는 핵심 개념으로, 삼육 사상은 근대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의 기본 자질을 육성하고자 하는 사회적 요구에서 만들어졌다. 삼육사상이 산업 혁명이 시작된 18세기 영국에서 완성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산업(생산)과 교육의 연관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체육은 그 개념의 탄생부터 교육의 하위 개념이라는 영역을 지시하고 있다. 그런데 교육 영역에 한정된 체육이라는 개념어가 왜 한국이라는 공간에서는 인간의 제반 운동 문화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가? 이는 한국의 근대라는 시공간에서 서양의 신체 운동 문화가 학교라는 기관을 중심으로 수입된 역사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통 이해되고 있다. 한국의 운동 문화는 서양의 스포츠 종목 수입에서 활성화된 측면이 큰데, 한국의 개화기라는 시공간에서 서양의 스포츠가 유입되고 유통되는 장소가 바로 학교였기 때문이다.
특히 해방 이후에 엘리트 스포츠가 학교라는 제도권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시스템이 고착화되면서 한국의 엘리트 스포츠는 학교와 더욱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1972년 신설된 체육특기자 제도와 체육특기자 제도 신설에 영향을 끼친 스카우트 관행[
4]은 축구, 야구, 농구, 배구 등의 프로 스포츠 주요 종목은 물론이고, 하키, 체조, 양궁 등의 여러 엘리트 스포츠 종목들까지도 학교라는 공교육의 체제 안에서 성장하게끔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인간의 제반 신체활동을 아우르는 한국어 어휘가 부재한 사회적 환경 위에서, 체육은 여러 신체 활동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자신의 지시 영역을 확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상의 원인에 대한 타당한 역사적 설명이, 적확하지 못한 개념어의 사용을 정당화하기란 어렵다. 현재 체육이 지시하는 현상은 교육을 넘어서 인간의 제반 신체운동 문화를 아우르고 있는데, 체육학이라는 학문 명칭은 교육학의 하위 학문 범주라는 명확한 개념적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학문 명칭은 그 학문의 정체성과 전문성을 드러내기에, 연구 내용과 명칭의 불일치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실제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체육이라는 명칭이 여러 방면의 체육 전공자가 하는 모든 일을 정확히 전달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전공 영역의 확대에 따른 새로운 직업군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그 직업군의 전문성을 드러내는 지시어가 없는 형편이다. 체육 전공자가 하는 일이 학생들에게 신체의 기초 운동기능을 가르치는 전문 영역으로만 한정되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체육이라는 어휘는 현재의 체육 전공자가 하는 일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상을 지시하는 어휘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면, 혹은 해당 개념으로 이해되지 않는 현상을 구획하고자 한다면 해당 어휘에 대한 정의(定義)부터 출발하는 것이 철학의 방법이다. 즉, 체육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체육의 정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치환해볼 수 있다. 이미 상술한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체육은 인간의 몸에 대한 교육이다’라는 명제를 보다 면밀하게 분석해볼 수 있는데, 김종선과 정청희(1979)는 체육을 “계획적인 신체활동을 통한 인간 행동의 변화”라는 보다 구체적인 명제로 체육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5]. 신체활동 자체를 목적으로 두는 것, 신체활동을 수단으로 하여 다른 목적에 도달하는 것 등 체육의 정의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보하려는 노력은 체육의 지향을 몸의 교육, 몸에 대한 교육, 몸을 통한 교육 등으로 달리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향 여부에 관계 없이, 몸이 그 교육 활동의 중요한 매개라는 점은 동일하기에 Williams(1956), Nixon(1964), Barrow(1971) 등의 여러 학자들은 체육이 교육의 일부라는 공통 인식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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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다시 말해, 체육의 정의를 더욱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하더라도 체육이 ‘몸을 중심으로 한 교육’이라는 주요 중심축을 중심으로 존재한다는 것에는 변화가 없다.
때문에 체육의 정의 자체를 보다 심층적으로 분석하려는 노력보다, 정의(定義)라는 분석 작업 자체의 일반적인 과정에 맞춰 체육을 재정의해보는 방법이 보다 유효한 분석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정의는 일반적으로 ‘종차(種差) + 유개념’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 정의된다. 즉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이 때 동물과 인간은 유개념(類槪念)과 종개념(種槪念)의 관계를 갖는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동물에 속하는 까닭에 인간은 동물보다 하위의 개념인 종개념이 된다. 역으로 말하면 동물은 인간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기 때문에 유개념이 된다. 종개념인 인간은 동물이라는 범주에 포함될 수밖에 없으나, 다른 종개념인 동물과는 구별되는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다. 이 차이를 종차(種差)라고 부른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체육은 몸의 교육이다’라는 정의에 대입하면, 여기서 체육의 유개념은 교육이며, 그 종차는 몸이 된다. 즉 체육은 수학, 영어, 물리를 교육하지 않고 몸을 교육하는 교육의 한 장르가 된다.
이렇게 정의라는 분석 작업의 일반적인 과정에 맞춰 체육을 재정의 해보는 것의 가장 큰 실익은 체육 개념의 외연(外延)과 내포(內包)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념의 외연이란 그 개념이 미치는 범위를 말하고, 개념의 내포는 의미의 명확성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누군가가 ‘체육은 신체교육, 스포츠, 건강을 포함하는 인간활동이다’로 체육을 정의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 정의는 체육의 범위를 인간의 모든 신체활동으로 확대하고 있어 언뜻 체육을 매우 대단한 무엇인가로 인식하게 만든다. 초창기 체육학자들은 이러한 개념적 조작을 통해 체육의 가치를 높이려 했다.
그러나 개념의 외연을 지나치게 확대해 버리면 그 개념의 의미(이를 내포라고 부른다)는 명확성이 떨어지게 된다. 반대로 ‘체육은 학교에서 스포츠를 가르치는 행위이다’로 정의하면 개념의 의미는 명료해지지만, 개념의 외연은 학교 안으로 대폭 한정된다. 개념의 외연과 내포는 반비례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학문 개념의 명확성 확보와 학문 영역의 범주 지정이라는 문제 앞에서는 ‘체육은 몸의 교육이다’라는 정의가 체육 개념의 외연과 내포 관계를 가장 균형 있게 설정하는 정의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다시 ‘체육은 몸의 교육이다’라는 처음의 명제로 돌아온다. 즉 체육학이라는 명칭은 엄밀히 말하면 신체 교육에 대한 학문을 가리킨다. 상술한 분석 명제에 의하면, 한국의 체육학회는 ‘신체를 교육하는 학문’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그와 어울리지 않는 다른 하위 학문 영역을 포섭하고 있는 형국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스포츠사회학, 스포츠심리학, 스포츠경영학, 운동생리학, 운동역학 등의 ‘체육’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 체육학의 분과 영역들은 그 명칭으로만 판단할 때 교육과 전혀 관련이 없는 분야이다. 물론 모든 학문에는 교육이 이루어지는 지점들이 존재하며, 앞서 언급한 체육학의 분과 영역에도 교육적인 활동 및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스포츠경영학의 제1 목적이 교육은 아니라는 점에서, 스포츠경영학이라는 명칭의 분과 학문은 엄밀히 말해 체육학 혹은 체육학회라는 단체에 소속될 논리적 근거를 확보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스포츠경영학이라는 학문을 체육학 분과학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현실 인식을 모두 공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체육학이라는 용어는 철학적 정의상 올바른 표기법이라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게 된다. 이제 우리의 사유는 그 대체 명칭을 찾아야 할 과제로 연결된다.
스포츠의 개념적 정의와 외연의 과도한 확장성: 정체성의 상실
현 시점에서 체육의 대체 명칭으로 가장 자주 거론되는 어휘는 ‘스포츠’이다. 체육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의 영문 번역 어휘로 사용(예, 대한체육회-Korean Sport & Olympic Committee)되기도 하며, 체육이 확장한 세계를 가장 잘 반영하는 어휘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스포츠가 체육을 완전히 대체하지 못한 것에는 분명 나름의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그 이유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체육의 정의를 분석한 방법과 같은 방식으로 스포츠의 정의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스포츠는 sport라는 영어권 국가의 어휘를 음차한 표현이기에, 체육처럼 해당 어휘의 글자를 분해하여 분석한 조합을 통한 개념적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전적 개념에서 어휘의 개념 분석을 시작하는 것이 더 합당한 방식일 것이다. Merriam-Webster’s learner’s 사전에 제시된 스포츠의 첫 번째 정의는 “a contest of game in which people do certain physical activities according to a specific set of rules and compete against each other”이며, 두 번째 정의는 “done for enjoyment rather than as a job or for food for survival”이다[
9]. 이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스포츠란 사람들이 특정한 규칙에 따라 특정한 신체활동을 하고 서로 경쟁하는 게임 대회이며, 직업이나 생존을 위한 식생활이 아닌 즐거움을 위해 행해지는 무언가를 의미한다. 즉 스포츠란, 본능에 따른 필수불가결한 생존 활동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특정한 양식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련의 활동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일련의 활동은 문화라는 개념어로 치환 가능하다. 즉, ‘스포츠는 문화다.’라는 명제를 도출할 수 있다.
스포츠가 문화인 이유를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화의 본질이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일반적으로 문화는 인간의 작용이 가해져 변화시키거나 새롭게 창조해 낸 모든 것을 말한다[
10]. 이 정의의 핵심은 인간의 작용이 가해졌다는 것, 다시 말해 자연(자연스럽게 스스로 존재하는)과 대치한다는 것에 있다. 즉 문화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인위적으로 구성된 그 무엇을 뜻한다.
독일 철학의 전통을 쌓아 올린 주요한 인물인 헤겔의 철학에서 문화는 ‘소외태(疏外態)라는 조금 더 구체적인 개념으로 설명 가능하다. 헤겔 철학에서 인간의 자아는 변증법적 운동의 과정을 거쳐 절대지(絶對知)로 나아간다. 이 때 변증법적 운동을 가능하게 하려면 주체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은 타자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주체에 소외되는 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주체의 자기 소외 과정(혹은 상태)을 ‘소외태(疏外態)’라고 부르는데, 이 때 주체를 소외하는 대상은 주체에 의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그 대상에서 소외되게 된다. 다시 말해 소외태란 자신이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신을 구속하는 상태를 말한다(절대지로 나아가려면 주체는 대상에서 분리될 수 없으며, 구속될 수밖에 없다).
이런 까닭으로 인간에 의해 창조된 문화는 언제나 ‘소외태’로 주어질 수밖에 없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약속이다. 약속은 인간이 정한 것이지만, 한 번 정해지면 그것이 도리어 인간을 구속한다. 약속을 사회적으로 확대하면 법이 될 것이다. 법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한 번 만들어지고 나면 오히려 법이 그것을 만든 인간을 구속하는 장치가 된다.
스포츠도 마찬가지이다. 규칙을 포함한 스포츠의 행위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나, 한 번 만들어지고 나면 인간이 스포츠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이처럼 인간이 만든 것임에도 오히려 인간을 구속하는 사태가 소외태인데, 이것이 곧 문화의 본질이다[
11]. 스포츠도 소외태로 존재하기에 스포츠도 문화임이 논증된다.
여기서 스포츠에 대한 정의를 체육과 마찬가지로 종차 + 유개념으로 설명하면, 스포츠의 유개념은 문화가 된다. 그런데 체육과는 달리 스포츠의 종차는 더 복잡하다. 다른 문화와 구별되는 스포츠의 종차 범위가 훨씬 더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몸이라고 생각해보자. 몸을 대입해 스포츠를 정의하면 ‘스포츠는 몸의 문화이다’라는 명제가 도출된다. 그런데 몸을 둘러싼 문화가 스포츠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옷도 몸을 둘러싼 문화이고, 화장도 몸을 둘러싼 문화이며, 문신도 몸을 둘러싼 문화이다. 따라서 ‘스포츠는 몸의 문화이다’ 라는 정의는 그 개념의 외연과 내포에 있어서 정합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스포츠의 정의를 구성하는 주요 개념이었던 ‘신체 활동(physical activity)’이라는 종차는 어떨까? ‘스포츠는 신체 활동 문화이다’로 정의하면 앞의 명제보다는 보다 정합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체 활동도 외연이 너무 넓기는 마찬가지이다. 악기연주, 생존을 위한 음식 재료 썰기, 심지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이라는 직업 활동도 신체 활동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신체 활동은 스포츠의 문화적 종차로 보기 어렵다.
지금까지 스포츠에 대한 합의된 정의가 도출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문화적 종차를 찾을 수 없는 스포츠의 독특한 특징에서 비롯한다. 그만큼 스포츠의 개념은 애매하다. 스포츠는 한마디로 정의되지 않는 매우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개념이다. 이런 이유로 스포츠의 외연은 점점 더 확대되어 간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e스포츠이다. e스포츠는 스포츠인가 라는 논쟁은 지난 오랜 시간 동안 스포츠철학의 주요한 화두였다. e스포츠를 두뇌 스포츠로 환치해서 생각해보면, 바둑, 장기, 체스가 여기에 속할 것이다. 지금 여기 우리의 논증에서 이것들이 스포츠인가 아닌가의 논쟁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스포츠 앞에 무엇이든 갖다 붙여도 말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댄스스포츠라는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문제는 이런 조합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점이다. 스포츠와 예술 양자는 비교적 분명하게 구획되어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현재 노래, 무용 등의 예술 영역이 스포츠의 경기 형식으로 향유되고 있다. 경쟁자(선수)들이 등장해 순위를 매겨 1등을 가르는 방식으로 현대인들은 안방에서 음악을 듣고, 무용을 감상한다. 머지않아 ‘음악 스포츠’, ‘로봇 스포츠’, 심지어는 ‘명상 스포츠’라는 신조어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이런 명칭이 가능한 이유는 스포츠가 신체활동이라는 내용을 지시하기도 하지만, 경기라는 독특한 형식을 지시하는 어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스포츠는 이미 특정한 시스템을 형용하는 어휘로 변모해가고 있으며, 그 영역은 신체활동, 운동 경기를 넘어 의학 등의 여러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복잡함을 해결하기 위해 스포츠의 영역을 확실하게 구획하여, 스포츠를 제도화된 규칙을 가진 경쟁적 신체활동으로 국한해볼 수도 있다. 이 가정은 스포츠라는 개념을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종목으로 한정해 제한적으로 사용하자는 주장으로 연결된다. 이 주장은 일견 스포츠 분야의 전문 영역을 명료하게 지정하여 스포츠라는 모호한 개념을 더욱 명확하게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논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스포츠의 외연이 경기 스포츠로 대폭 축소되어 스포츠로 인식되었던 활동들을 소외시키게 된다. 앞서 살펴본 “즐거움을 위해 행해지는 무언가’라는 정의에 포함되는 등산, 서핑 등의 신체활동이 스포츠의 정의에 포함되지 못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때문에 경기 스포츠로 스포츠의 외연을 한정하는 것 또한 정합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스포츠와 신체활동이라는 범주 정의의 애매함은 스포츠가 놀이와 게임으로부터 진화해온 발생론적 이유 때문이다[
12]. 놀이와 게임, 그리고 스포츠가 차별되는 기준은 규칙, 경쟁, 신체활동인데[
13], 스포츠는 가장 상위 개념으로서 규칙과 경쟁을 이미 모두 포함하고 있는 신체활동이기에 스포츠의 영역에서 놀이와 게임의 영역을 분리해내기는 어렵다. 또한 대근육을 사용하지 않는 지적인 경쟁(Intellectual contest) 영역으로 정의되었던 e스포츠 또한 신체를 사용하는 활동이라는 논증이 스포츠철학 학계에서 증명되면서, 스포츠의 개념을 정의하는 가장 주요한 논증이었던 Guttmann(1978)의 스포츠 정의 범주[
13]도 수정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스포츠의 외연이 정지된 것이 아니라 운동하고 있음을 드러내며, 이는 곧 스포츠의 외연을 정합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체육보다 훨씬 더 까다로우며 복잡한 현실적인 문제를 수반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정의 규명의 어려움과는 별개로, 이러한 풍부한 외연은 스포츠라는 개념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매력과 가능성이기도 하다. 스포츠는 그 내용과 형식 측면에서 거의 모든 신체 활동 문화를 수렴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어휘이기에 스포츠를 다루는 학문의 외연은 스포츠를 정의하는 현재의 사전적 정의를 넘어 건강, 보건 등의 영역으로 더욱 꾸준히 확대될 것으로 예측된다. 학문 영역의 확대라는 미래는, 마치 영토를 확장하는 징기스칸처럼 스포츠학의 영토를 확장해 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발전이라는 좋은 청사진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외연의 확대는 내포의 축소를 가져온다. 내포의 축소는 그 명칭의 확실한 정체성이 애매해진다는 의미이다. 무엇이든 다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무 것도 될 수 없다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포츠의 외연적 확대는 자칫 스포츠학 자체의 정체성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이런 현상은 이미 도처에서 관찰되고 있다. 스포츠를 독립된 스포츠학 영역에서 다루지 않고 모(母)학문 영역에서 연구하는 경향성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포츠사회학이라는 분과 학문 혹은 학회에서 스포츠를 사회학이라는 렌즈와 방법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학이나 인류학 분야에서 스포츠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 연구하는 사례는 이미 보편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스포츠는 여러 학문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으며, 학문의 구획 경계의 벽이 낮아져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는 현상은 현대 학문의 조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특히 스포츠학 영역의 고등교육 현장에서 주로 관찰된다는 특이점에 주목해본다면, 스포츠라는 개념의 모호성과 학문적 외연을 지나치게 확대할 경우 나타날 수 있는 인과적 결과-스포츠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정체성 상실-는 해당 학문의 전문 영역을 오히려 축소시킬 가능성을 크게 함의한다.
즉, 스포츠 개념이 갖고 있는 확장성은 체육으로 지시해 왔던 영역이 확장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 위에서 체육학을 대체하는 어휘로 적합해 보인다. 그러나 스포츠의 장점이기도 한 풍부한 외연의 확대는, 그 풍부함의 과도함으로 인해 스포츠가 지시하는 전문 영역의 정체성이 애매해질 가능성을 크게 내포한다. 이런 현상은 이미 우리 나라 대학의 (체육 및) 스포츠 관련 학과 명칭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리나라의 종합대학과 전문대학의 (체육 및) 스포츠 관련 학과 명칭은 현재 100여개가 넘는다. 학문의 명칭과 분야의 다양화는 언뜻 학문의 진화로 보일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열에 가깝다.
키네시올로지(Kinesiology: 운동학)의 개념적 위상과 대안적 가능성
상술한 논증에 따르면 스포츠의 개념적 정의는 그 개념의 외연과 내포의 관점에서 정합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스포츠는 향후 몸과 관련된 경쟁적인 신체 행위를 모두 수렴하는 용어가 될 가능성이 높다. 몸을 움직이는 신체 활동의 개념 또한 e스포츠에 의해, 근대스포츠가 추구해온 대근육 활동을 바탕으로 밖으로 확장되는 신체의 운동 형식이 아니라, 신체의 탁월성을 안으로부터 해체해 정교함과 세밀함을 추구하는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을 추구하는 형식으로 확장되고 있다[
14]. ‘휴먼 무브먼트(human movement)’라는 체육학의 학문 영역을 지시하는 새로운 어휘는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스포츠의 외연의 확장은 필연적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동반할 것이다. 지나친 외연의 확장은 스포츠를 스포츠가 아닌 것으로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의 애매함이 필연적으로 도래할 것으로 예측된다면, 그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개념 모색이 필수불가결하게 요청되어야 한다. 새로운 개념의 실제적인 사용 여부와 관계 없이, 사고의 실험은 기존의 지식 확장에 분명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요 위에서 체육과 스포츠가 공통적으로 함의하는 몸의 움직임이라는 ‘운동’이라는 개념을 보다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여러 어휘에 대한 정의 분석 작업이 요청된다.
몸의 움직임이라는 ‘운동’을 지시하는 개념에는 무브먼트(movement)와 키네시올로지(Kinesiology)라는 두 개의 표현이 있다. 그런데 전자인 ‘movement’는 인간의 움직임(Human Physical Movement)과 사회 운동(social movement)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movement’라는 개념어가 지시하는 운동의 외연은 두 영역에 넓게 혼재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독립 운동, 새마을 운동, 환경 운동 등의 표현은 개인 운동, 단체 운동, 운동량 등의 어휘와는 완전히 다른 영토 위에 놓여 있다. 때문에 인간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학문 영역을 지칭하는 ‘휴먼 무브먼트(human movement)’라는 새로운 표현이 생겨났다. 그러나 무브먼트라는 표현이 위장 운동, 회전 운동으로 사용될 때는 개인 운동, 단체 운동이라는 개념과는 또 다른 영역에 놓이게 된다. 이는 휴먼 무브먼트라는 표현이 근육의 미세한 운동까지 포괄하는 개념이기는 하나 이런 이유로 오히려 기존의 체육이 함의했던 몸의 움직임을 통한 교육적 의미, 신체활동을 통한 즐거움 등의 개념을 담아내지 못함을 드러낸다.
반면 키네시올로지(Kinesiology)라는 개념어가 지시하는 운동은 신체 운동으로 그 범주를 한정하기 때문에 무브먼트와는 달리 스포츠 혹은 체육과 동일한 범주를 호명한다. 키네시올로지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키네시스(Kinesis)에서 유래한 개념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활동을 키네시스(kinesis)와 프락시스(praksis)로 구분한다[
15]. 영어 프랙티스(practice)의 어원이 되는 프락시스는 활동 그 자체에 목적이 내재되어 있는 행위를 말한다[
15]. 생각하는 행위가 여기에 해당한다. 생각은 생각이라는 그 행위 자체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웰빙(wellbeing), 행복이라는 행위 혹은 상태는 프락시스에 해당한다. 잘 사는 것과 행복은 그것 자체가 목적으로, 그 이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키네시스는 외재적 목적을 갖는 행위를 말한다[
15]. 즉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행위를 가리킨다. 프락시스를 제외한 인간의 신체 행위는 반드시 목적을 갖는다. 걷기는 이동하기 위해서이고, 달리기는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서이다. 키네시스에서 분화한 개념인 키네시올로지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행하여지는 인간의 활동, 혹은 그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을 말한다. 뚜렷한 외재적인 목적을 갖고 이루어지는 활동은 인간의 신체를 통과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키네시올로지는 인간의 제반 신체 활동 혹은 이를 연구 대상으로 하는 학문임을 의미하게 된다.
인간의 신체를 통과한 활동(움직임)이라는 개념을 명료하게 함의하는 키네시올로지는 체육이나 스포츠에 비해 훨씬 더 구체적인 영역을 지시한다. 물론 체육도 개념의 외연과 내포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구체적이고 정합적이다. 그러나 체육은 교육이라는 한정된 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뚜렷한 한계를 극복하기 어렵다. 이미 체육학은 교육의 영역을 벗어난 곳으로 영역을 확장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체육이라는 표현으로 현재의 체육학(혹은 스포츠학)을 지시할 수 없는 큰 맹점은 현재 스포츠를 넘어 의료와 보건으로 확장되고 있는 전문 영역의 범주를 절대로 포괄할 수 없다. 풍부한 외연을 갖고 있는 스포츠는 일견 이를 가능하게 하는 듯 하지만, 풍부한 외연은 내포를 불분명하게 하기 때문에 스포츠라는 개념은 전문성 상실이라는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체육과 스포츠가 넘기 어려운 이런 한계에 비교해, 키네시올로지가 갖는 장점은 그것이 지시하는 개념의 외연과 내포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너도 건강해지려면 운동을 해.”라고 말할 때, 운동 대신 체육이나 스포츠를 대입하면 표현이 어색해진다. 체육과 스포츠는 그 자체로 움직임을 내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체육은 교육을 지시하고, 스포츠는 특정한 조건을 수반하는 신체활동의 총칭이기 때문이다. 체육과 스포츠가 명사적인 개념이라면 운동은 명사 뿐만 아니라 동사적인 표현에도 가깝다.
어휘의 정의 분석이라는 논리적인 정합성을 기준으로 한 이상의 논의는 현재로서는 키네시올로지라는 개념어가 학문의 구체적인 대상을 추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학문 영역을 가장 잘 호명할 수 있는 명칭임을 드러낸다. 키네시올로지는 체육과 스포츠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신체라는 중심을 정확하게 지시할 뿐만 아니라, 신체활동(운동)을 통한 외재적 목적 달성을 위해 이루어지는 행위이기에 체육이라는 기존 용어의 핵심 개념을 함의하며, 스포츠라는 어휘의 특성인 (운동하는) 확장성까지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키네시올로지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운동학(運動學)이라는 번역어로 통일될 수 있다는 점에서 국제적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장점도 갖는다.
물론 철학적 논증이 언제나 현실과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키네시올로지는 1960년대 이전까지 생체역학(Biomechanics)과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었으며[
16], 한국 운동역학의 초기 역사를 견인한 연구자라고 볼 수 있는 신인식과 정철수(1996)도 키네시올로지를 ‘운동학’이 아닌 ‘기능학’으로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17]. 운동역학이 키네시올로지라는 명칭으로 미국에서 발전해 온 역사는 키네시올로지를 체육과 스포츠를 대표하는 개념어로 호명하는 것에 저항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내 상위 20위의 대부분의 대학 박사과정에서 키네시올로지라는 학문단위를 채택한 점(18), 1993년에 미국에서 창설된 단체인 ‘American Academy of Kinesiology and Physical Education’이 2010년 9월에 ‘National Academy of Kinesiology’로 명칭을 바꾼 점[
19]은 키네시올로지가 인간의 움직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의 대표 명칭으로서 헤게모니를 쥐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키네시올로지라는 용어의 등장은 학문의 통합을 위한 새로운 시대적 요구 혹은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체육학처럼 다학제적인 학문은 많은 하위 학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하나의 단일한 명칭으로 통일하는 일은 학문의 정체성에 대한 요구로부터 이루어져 논리적 정합성을 확보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Gill(2007)의 주장대로, “학제간 학문은 하위 영역의 실질적인 연결을 의미하며, 학제간 학문으로서의 키네시올로지도 하위 학문을 통합하기 위해 필수적”일 수 있다[
20]. 다시 말해 인간의 운동과 신체활동을 연구하는 개별 학문 명칭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를 전부 포섭하는 대표 명칭을 수정할 수밖에 없는데, 적어도 현재의 상황에서 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용어가 키네시올로지라는 것이다. 이는 키네시올로지라는 용어의 등장이 세분화되어가고 있는 체육 연구 분야의 전문성을 더욱 명료하게 하고, 체육의 학문화와 체육 현장(관련 직업의 전문성)의 직역(職域) 구획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환기한다.
그러나 키네시올로지라는 어휘가 과거에는 스포츠자연과학의 학문 영역 일부를 의미[
19]했다는 역사는 인문사회와 자연과학이 공존하는 종합학문인 체육학의 학문 영역을 자연과학으로 축소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여전히 불러 일으킨다. 한국 뿐만이 아니라 중국에서도 여전히 키네시올로지를 운동기능학(運動技能學)으로 인지하고 번역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키네시올로지라는 개념어가 갖는 대안적 가치가, 지금 여기서 체육과 스포츠라는 분석 명제 분석을 통해 철학적으로는 논증이 되었다는 것이다. 현실의 문제는 향후 운동학의 담론이 활발히 전개되어 보편화되면 현실의 정합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결론
현재 체육과 스포츠는 동일한 개념과 지시대상을 갖는 것으로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체육과 스포츠는 같은 대상을 지시하지 않으며, 각자 다른 내포와 외연을 갖는다. 체육은 개념적 정의상 논리적 정합성을 가장 잘 확보하고 있지만, 지시하는 영역이 현실을 제대로 포괄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한계를 갖는다. 반면 스포츠의 넓은 외연은 체육이 담아내지 못하는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만, 지나친 외연의 확대로 인한 정체성의 상실로 전문성의 약화라는 중대한 문제를 야기한다.
키네시올로지(운동학)라는 개념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의 위치를 논리적으로 확보한다. 인간의 신체를 통과한 활동(움직임)이라는 개념을 명료하게 함의하는 운동학이라는 어휘는 학문의 구체적인 대상을 추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움직임을 다루는 학문인 체육 혹은 스포츠라는 학문 영역을 명확히 드러낸다. 논리적 정합성의 관점에서, 키네시올로지는 체육과 스포츠를 대신하여 학문 영역을 호명하는 개념어의 지위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갖는다.
하지만 철학적 논증이 언제나 현실과 합치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키네시올로지가 과거에는 운동역학(Biomechanics)라는 체육학의 일부 하위 분과 영역에 갇혀 있었던 역사는 키네시올로지를 ‘운동학’이 아닌 ‘기능학’으로 인지하게 하여, 키네시올로지가 인문사회와 자연과학 모두를 포괄하는 체육 혹은 스포츠라는 학문 전 영역을 동일하게 지시하기에는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다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게 한다. 그러나 체육/스포츠라는 학문 영역 범주의 확장과 세분화되어가고 있는 체육 연구 분야의 발달이라는 현실은 체육의 학문화와 체육 관련 직역의 전문성 영역 확보를 위해서 새로운 학문 명칭이 필요함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라는 헤겔의 경구는 키네시올로지, 즉, 운동학이라는 정합적인 개념어를 지속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환기시킨다.
본 연구는 우리의 과제가 당장 체육의 개념적 한계를 대체하는 명칭을 스포츠와 운동학 사이에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만 체육의 개념적 한계가 분명해진 이상, 적어도 우리의 학문을 대표하는 명칭이 개정되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는 출발점은 이미 보편적 합의를 획득했다. 본 연구의 목적은 체육의 대체 명칭의 결정을 열린 공간에 올려 놓아 그 열린 공간을 이론적 논쟁과 학문공동체의 합의 도출로 이끄는 논의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본 연구는 운동(Kinesiology)이라는 대안 개념을 그 열린 공간의 주요한 행위자로 등장시키고, 그 행위자의 철학적 정합성에 대해 고찰하였다. 개념어, 특히 하나의 학문 분야를 대표하는 개념어는 철학적 사유 뿐만 아니라 다각도의 고찰이 필요하다. 본 연구가 정합적인 학문 명칭의 수립을 위한 다양한 이론적 논쟁의 시작점이 되기를 희망하면서, 향후 많은 후속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